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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초대 展

금보성아트센터

2017-07-02 ~ 20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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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보성아트센터

2017. 7. 2(일) ▶ 2017. 7. 9(일)
서울시 종로구 평창36길 20 | T.02-396-8744
blog.naver.com/kimboseong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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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의 속살들

 
김영미(시인, 문학박사)

그림은 언어의 바깥 세계에 자리한다. 즉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속에 그림이 있다. 언어와 그림은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커다란 힘은 ‘모호성’과 ‘암시성’을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암시로 가득 차 쉽게 해독되지 않는 미술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좋은 장르이다. 김선우 화가의 작품들에서 비범하고 독특하며 미묘한 자의식이 엿보인다. 하여 그림 속에 내재된 ‘화가의 흔적’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흔적은 ‘그림 속’에 존재한다. 그림이 곧 그의 화신化身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어떤 사물 혹은 풍경을 본다는 것은 단지 망막을 통해 대상의 형상이나 색 등을 인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기도 하며 보지 못하기도 한다. 특히 화가의 눈은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자신만의 이미지와 결합시켜 또 다른 풍경을 생성한다. 즉 ‘시선’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그만의 고유한 시선이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감정 상태와 가치관이 드러나는 지극히 주관적인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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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작품을 볼 때 몽환적인 감상보다는 불편함과 거부감이 먼저 앞서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현실과 실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현실은 인간의 깊은 곳에 묻어 두거나 묻어 두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각화되어 우리 눈앞에 펼쳐질 때, 틈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들의 심리 속에 변주되어 각자의 심연을 건드리며 나타난다. 따라서 충격과 거부감, 기묘함과 동시에 금기시 된 것을 훔쳐보는 호기심과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그가 캔버스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은 건조한 현실 고발이나 감정과잉의 폭로가 아니라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린 영혼의 기록일 것이다.

작품 중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상흔을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이미지로 현실화시켰다. 이 작품은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처녀작인 동시에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은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의 어리석음과 지식인들의 이중적인 속물근성을 우스꽝스럽고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신랄한 풍자와 해학의 이면에 인간의 쓸쓸함과 서글픔을 느끼는 고양이의 모습은 작가자신의 마음을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김선우 화가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어떠한가. 말이 끝나는 곳에서 그림이 시작된다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그 진리를 되새김하는 이 작품은 왠지 모르게 보는 이의 마음을 꿰뚫어 부동의 자세를 만든다. 그래선지 그림은 시선을 압도한다. 마치 누군가의 악몽이나 환상을 마주 보고 서 있거나 그 현장의 제 3자로써 희생물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묘한 감정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 현장은 폭력과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낸 현대사회의 신경증적인 환상과 닮아 있고, 또 억눌린 욕망과 불안을 동반한 반사회적 특성을 지닌 잔혹함이 흩고 지나간 흔적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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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작품을 주도하는 눈동자의 초록은, 단순한 선으로 볼륨과 형태를 만들어내고, 강렬한 원색으로 평면의 캔버스에 입체감을 완성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그림자 없이 테두리선을 이용해 색깔을 담아내어 평면이 입체적으로 보이게끔 한 것이다. 그는 대상의 형태를 최소한으로 축약하고 색채로 대상과 공간을 채우며 균형을 이뤄낸다. 질서 속의 행태, 형태 속의 질서를 상상력을 통해 구축해낸 작품이다. 이렇듯 고양이를 통해 결국 사람은 사람을 본다. 친구를 통해 자신을 보듯, 고양이는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단순한 선들로 축약되면서 고양이의 생김새는 부각된다. 그 안에서 두려움은 거부, 신비는 호기심을 야기시킨다.

화가는 캔버스의 결에 따라 먹의 흘러내리는 효과를 극대화하는 표현기법을 사용했다. 주목할 것은 먹물의 우연적 흐름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에 있다. 특히 고양이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는데, 미묘하게 다른 양쪽 눈동자와 대비되어 두려움과 신비스러움의 이중적 감정을 자아낸다. 또 양복을 입은 고양이의 우스꽝스런 모습 역시 어설픔과 동시에 쓸쓸함으로 다가온다. 즉 표정과 의상 그리고 포즈는 내면과 긴밀하게 교직되어 상응하면서 생동감을 더해 준다. 따라서 고양이의 당당한 응시는 내면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외현적 텍스트이자, 내적 지향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시각적 단초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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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 더럽게 튀는 모양을 통해, 현실의 더러움을 겪고 나서 비웃는 소세키의 구질구질한 현실을, 힘든 현실을 표현하려 했어요.”라는 화가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그 느낌은 빛을 발한다. 바로 의도의 패턴이다. 자세히 살피면 고양이의 당당한 응시에 비해 배경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마커로 살짝 그린 사람들의 모습은 얼핏 보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여기에 그 주변을 살피는 고양이의 행태에서 왠지 모를 불편한 감정과 위태로움이 오버랩 된다. 남들과 소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표정, 화려한 색감은 없지만 고양이의 눈빛만은 살아있다. 색채의 흐름을 짧게 끊는 선들로 표현한 방식은 더욱더 생생하고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하여 눈 속에 넘실대는 먹의 붓 터치가 마치 캔버스를 뚫고 나올 것 같다. 대체로 정면상은 신성한 존재로 자신을 드러냄에 있다. 그 이면에 열등한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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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도전적인 시선은 불편한 진실인가. 일종의 냉소인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는 저돌적인 포즈와 흐트러진 붓터치 그리고 마커의 대비가 존재한다. 더 나아가 인간의 모습이 한낱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고양이의 뒤에 물러나 있다. 즉 모두 뒤집어져 있다는 사실이 비중 있게 드러난다. 정면을 응시한다는 것은 이미지가 그려진 앞면이 아니라, 네 각의 안에 뼈대만 드러나 있는 뒷면에 주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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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품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강렬함에 이끌려 무엇을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당혹스럽다기보다는 신비감으로 다가온다. 욕망의 반영이며 유머러스한 상상, 잔인한 현실 그 사이 어딘가에 현실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각자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고양이의 시선은 인간들의 행태 모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들 태어나고 죽는다. 평범한 삶에 깃든 인간들의 이야기가 세월이 지나면서 더 어둡게 정돈된 시선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보는 이를 긴장시키는 날선 시선에서 지난한 삶의 고단한 파편, 선택의 권리가 없는 자들의 무기력함, 인간 속에 꿈틀거리는 생에 대한 불안과 불신 등이 꿈틀거린다. 번득이는 눈과 하늘로 솟을 듯한 귀가 이 시대의 자화상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김선우의 그림들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연의 적층 위에 떠오른 흔적이나 기록들이다. 여기에 그녀만의 상징과 형식을 입어 비로소 표상성을 획득했다. 그림의 뒤편에 배접된 이야기가 실로 궁금하다. 무엇보다 화가가 경계를 넘어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연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림으로 세계를 보는, 한 곳에 매이지 않는 소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한 밤 별빛 뒤에는 무한한 어둠의 에너지가 우주를 흐른다. 점 하나가 찍히면 그 바깥은 여백으로 변한다. 부재가 존재를 압도한다는 말이 나온 연유다.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는 무수한 사연과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그림과 만나는 매 순간을 지켜보며 그 무한한 부재의 너비를 실감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본 것은 겹치는 선과 점 또는 파편이었고, 그 바깥은 미지의 무한대였다. 고양이의 눈빛은 존재하는 점과 선이 지닌 무한의 에너지로 발현된다. 진실은 늘 문틈 바깥을 질주하는 준마의 잔영 같아 붙잡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아슬아슬한 눈동자가 더욱 매혹적이다. 우리는 살면서 매 순간 응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이러한 탐사의 즐거움을 통해 존재와 부재를 만나게 하고, 결국 그 너머의 무한대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미래는 예측불가능하고, 과거는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며, 현재는 늘 과거가 된다. 따라서 시간의 연쇄 고리 안에서 진정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작가들은 그림을 통해 다른 미래를 상상 혹은 예견한다. 바로 이들을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미래가 단순히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이미 와 있는 모습을 젊은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김선우 화가가 그러하다.

미래를 열어 보이는 화가를 만나는 일은 곤혹스런 즐거움을 제공한다. 투명한 미래가 아니라 흐릿한 현실에서 길어 올린 ‘낯선 미래’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막막하고 건조한 현실 속에서 점점 초라해지는 자의식의 세계를 마음껏 탐색하는 것은 화가의 자유다. 그녀의 창작 행위는 미정형의 기법과 미래를 담지하고 있다. 그 사유의 빈틈으로 정제되지 않은 자의식이 새로운 응시로 좀 더 밀도 있게 놓이길 바란다. 더불어 자기와 세계를 동시에 위로하고 응시하는, 그리하여 다른 미래를 향할 수 있는 타자성의 분출을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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