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철 초대展
장은선 갤러리
2017-05-03 ~ 2017-05-20
본문
‘회수(繪繡) - 그리움을 그리다’
About wish 1710_85x85cm_장지에 채색과 바느질
장은선 갤러리
2017. 5. 3(수) ▶ 2017. 5. 20(토)
Reception: 2017. 5. 3(수) pm 4:00 - 6:00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3-8 | T.02-730-3533
About wish 1703_85x85cm_장지에 채색과 바느질
회화의 요철로 드러나는 질료의 사유
흔히 동양회화의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움에 있다고 한다. 마음을 비우고, 먹을 아끼고, 설채를 절제함으로써 화면은 형언할 수 없는 직관으로 펼쳐지고 기운으로 생동한다고 한다. 혹여 이 비움이 형태의 결손을 초래한다 한들 그 의미에는 어떤 결락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또한 동양미학의 진면목이라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김순철의 도자기 이미지는 표현된 각각의 형체가 너무나 여실하고 정치하여 이 덕목과는 다른 유형에 속하지 않나 싶다. 아니 전통 동양화의 견지에서는 다른 유형이 아니라 파격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우선 어떤 화면은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의 물성이 그대로 드러나있고, 어떤 화면은 여백 없이 촘촘하게 모란이나 댓잎의 문양이 상감기법에 버금가게 오롯하게 새김되어 있기도 하다. 먹 또한 아꼈다기보다는 화면 위에 방사되었다가 다시 닦아내서, 표면과 음각의 문양에 먹빛과 선으로만 남는다. 그 위에 바탕의 치밀한 정교함과는 차원이 다른, 단아하고 담박한 도자기 실루엣이 담황색 면실로 바느질되어 있다. 이렇듯 붙이고, 새기고, 칠하고, 닦고, 꿰매기를 중첩하여 이루어지는 화면은 지난한 과정과 노고를 차치하고라도 ‘비움’의 미학과는 다소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순철이 구현하는 저부조의 화면, ‘회수(繪繡)’의 첫 번째 축은 채움으로써 작동하는 ‘과정’의 언어로 귀착된다. 그의 작품 속속들이, 구석구석까지 노동과 일상의 노정이 깔려있다. 가히 인고의 과정이다. 예컨대 도자기 이미지를 갈무리한 면실은 어떤 삐침도 없이 빼곡히 바느질되어 신체의 집중과 땀의 시간을 느끼게 한다. 속도가 미덕인 디지털 시대에 걸맞지도 않는 느림의 미학이다. 게다가 작금의 작가들이 보이지 않는 개념과 작가의 신체행위를 맞바꾸고 있는 현실을 떠올려 보면 김순철의 작업방식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물론 작품의 가치는 노동의 대가나 인고의 잣대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화면은 작가와 결속하는 동반자가 된다. 동반자적 관계가 늘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신념을 공유하고 동일한 감성에 동조함으로써, 결국 은밀한 공명으로 가득한 보다 높은 정신적 호흡으로 세계를 나름으로 체화할 수 있는 것이다. 과정을 통해 작품은 세계와 소통이 발현되는 동시에 세계의 다양한 언어를 수렴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물 너머의 정신적 산물이 된다. 따라서 작가는 ‘노동의 단순함’과 ‘손끝의 고단함’을 토로하면서도 이 과정을 더 심화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듯하다. 이 과정으로 해서 김순철의 회화는 평면(plane)적이기보다는 표면(surface)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표면적이라 가름하는 것은 이미지를 압인하고 색을 칠하고 다시 지우면서 마치 상감기법으로 구현된 듯한 배경과 중심부에 위치한 저부조의 형상이 순환의 생성구조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배경의 새김과 이미지의 돋음은 화면의 촉각성을 불러 일으키면서 재료로 사용되는 면실이 단순한 질료의 차원을 떠나 물질의 세계로부터 관념의 세계로 호출되기에 이르는 오브제의 영역까지도 기웃거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성을 넘어 관념, 그렇다면 문제는 김순철이 왜 그토록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 면실의 바느질로 무엇인가를 재현하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왜 그가 전통회화와는 다소 거리가 느껴지는 오브제의 연금술로 자신의 화면을 조성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 도자기 이미지는 외연일 뿐이지 도자기를 재현하는 것이 그 본질은 아니다. 짐짓 도자기의 이미지로 인해 소재주의적 발상으로 오해 받을 위험성도 상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작품을 보고자 했을 때 제일 먼저 감상자의 시선을 반긴 것은 재언의 여지없이 중앙에 자리잡은 형상이다. 통상 감상자가 어떤 작품의 결정된 구조가 아니라 형태를 먼저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거기에 면실과 바느질이 우리네 삶의 해묵은 기억과 시간의 켜를 들추어내고 있다. 이 기억과 시간의 켜는 한편으로는 고되고 반복적인 노동을 통하여 치밀한 완성도의 화면을 보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치밀함과 장식적 미감 때문에 전통적 미학의 문맥에서 슬쩍 벗어나 회화와 공예의 회색지대에 위치시키는 화면을 보게 한다. 혹 그렇더라도 그의 작품이 회화의 전통적 구조체계를 충분히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이 회색지대는 전통과 현대, 예술과 일상, 질료와 형상 등의 기표로써 작동할 뿐이다. 반면에 잠복하고 있던 어떤 기의가 불시에 솟구치는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예술적 위상을 복원한다.
작가는 전통적 방법론을 공격하거나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상적 사물(1차적 질료)과 행위(2차적 질료)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 회화관과의 호환성을 염두에 두고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근자에 유행하듯 일상적이고 비미적인 재료의 도입 자체가 마치 작품의 새로움을 담보하는 필요충분조건이기라도 한 것처럼 실이라는 질료에 탐닉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축으로서 김순철의 회화는 질료 자체의 물성에 함몰되거나, 질료를 단순히 형상의 보조제로 전용시키지도 않으면서 양자 간의 ‘조응’을 이끌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더불어 절제된 단색조의 채색 또한 이 조응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다. 이런 시도는 질료와 형상의 충돌과 대응이 아니라 양자를 매개하는 보편적 미학의 구조화에 역점을 두는 것이다. 요컨대, 질료를 조형의 잠재태로서의 기반을 수렴하는 한편 형상 또한 형상 자체로서의 독자적 구조를 보유한다는 것을 화면을 통해 입증하는 것이다. 김순철은 양자를 조율하면서 무엇보다도 어느 한 쪽으로 경도되는 우를 범하지 않고 있기에 회화의 면모를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작가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다소 표현주의적인 연작에서는 면실이 형상의 재현에 기여하기보다는 화면을 무정위로 횡행하면서 배경과 형상 모두를 아우르며 조응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선묘의 바느질이 바탕과 형상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은 질료가 이제 단순히 재료의 차원을 넘어, 물성을 넘어 오브제의 영역을 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는 김순철의 선택된 질료가 일상의 속성이나 본질에서 벗어나면서 기존의 인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산수화로 회귀하는듯한 작품들에서 면실의 바느질은 마치 바람 같은 형적으로 남을 뿐 접합, 연결, 치유 등의 어떤 의미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의외로 이 불연속의 실선들은 화면을 쉼 없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의 구조들을 창출하면서 이끌어 낸다. 닫혔던 구조가 풀리자 조응의 기제는 형태의 결손을 야기했을지 모르지만 그 의미의 결락에는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김순철의 회화가 전통 미학의 진면목을 다시 실천하기에 이른다는 의미다. 명백히 질료의 능동적 확장이 김순철의 회화 그 자체를 매우 색다른 존재로 변모시켰다. 그럼에도 결국 화면은, 질료는 일상의 모든 사물들처럼 여전히 속성과 사건,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 질료의 속성들이 예측된 것이든 아니든, 채색과 형태가 치밀하게 계산되었든 아니든 작가의 상상력과는 무관하게 물질적 상상력으로부터 나왔을 때 더 극명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
김순철의 화면에 안착하고 있는 실은 ‘행위로서의 바느질’, ‘매체로서의 바느질’, ‘변용으로서의 바느질’, 여기에 ‘날 것’으로서의 바느질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들 모두 또한 ‘해석된 오브제’로 명명될 수도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김순철의 실이 물성을 기반으로 하는 질료에 속하는지 대상의 속성이 소거된 오브제의 영역에 속하는지는 분명치 않다(물론 결과물인 작품을 포함한 이 모두를 오브제라 통칭할 수도 있다). 만약 후자에 속한다면 창작의 주체로서의 작가의 위상과 자율적인 연상작용을 작동시키는 오브제의 위상은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양자가 하나의 단일한 연속체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오브제는 감상자와의 사이에서 의식의 순행과 역행, 추동과 부동, 외연과 내밀 등의 간극이 동시적으로 발생하기에 작가의 창작영역에 전적으로 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순철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화면 위의 착종된 이미지만이 아니라 그의 망막에 비친 세계와 거기에 사용된 질료와 그 질료를 다루는 작가의 신체, 즉 전신의 망막들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동양미학에서는 정신과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 신체의 언어 또한 중시하였다. 그것은 필세로, 기운으로 화면을 가르게 된다. 이때 붓은 칼보다 예민하다. 결론적으로 김순철 작품의 요체는 결과가 아닌 과정과 착종된 이미지와 바탕의 호응에 있다. 이것들은 엄숙한 존재의 명제이기도 하지만 실존의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치밀하면서도 담백한, 섬세하면서도 농밀한,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교차내지는 경계의 지형을 담아내는 김순철의 회화는 전통의 존엄과 현대의 혁신을 가로지르는 탁월한 감성적 에너지로 일상의 오브제를 새로운 예술의 층위로 확장시켜 가고 있다.
- 유근오 (미술평론)
About wish 1715_80x80cm_한지에 채색과 바느질
About wish 1702_85x85cm_한지에 채색과 바느질
About wish 1711_33x150cm_장지에 채색과 바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