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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있었다 > 작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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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 우영희
제목 처음부터 있었다
사이즈(호수) 46×46cm (10호)
재료(표현기법) Mixed media
제작년도 2017
구매가격 1,500,000 원
작품출력 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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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정보

상품 상세설명

우영희 <처음부터 있었다>

우영희, < 처음부터 있었다>, Mixed media, 46×46cm, 2017

FRACTAL

그해 칠월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가 소낙비와 함께 안개로 뭉쳐있었다. 시곗바늘은 3을 가리키고 압축하며 조여 오는 새벽공기가 불현 듯 나를 옥죄어옴을 느낄 즈음 시야에 들어오는 미완의 그림들 잠시 붓질을 멈춘다. 그때 나는 어떤 공허를 그리려 애쓰던 중이었다. 환원과 윤회로만은 인식 불가능한 삶 나는 의문스러운 세상살이를 조롱하고 순수의 잔여물을 탄식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찌 됐든 나는 숨겨진 영역에 대한 그 모호한 신비로움을 그림으로 놀이하는 호모루덴스의 후예가 아니던가. 삼라만상이 벗어날 수 없는 그 혼돈과 질서의 반복적인 패턴 – FRACTAL 오늘도 그를 그리고 있다.

That year in July daisy fleabanes were coming out splendidly like a wad of fog together with a summer shower The clock says three and when the compressing morning air suddenly feels strangling unfinished paintings come into sight I stop the strokes At the moment, I was trying to paint certain voidness Life can not be perceived with only reincarnation and metempsychosis Maybe I wanted to laugh at devious lives and lament the residue of genuineness Luckily or unluckily was I not the descendant of homo ludens who plays sketching the vague mystique from the unknown FRACTAL – the repetitive pattern of chaos and order no creature can deviate from I am painting it as ever.

- 우영희 작가

몸으로 만나는 언어들

이미지는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자면 그냥 사물 현상, 그냥 사건이 아니라<원초적인 언어>이며 뒤랑의 말로 쓰자면 <의미화>이다. 이미지는 세계 속에 사는 주체자로서의 인간의 표현이자 한 주체자가 세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대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며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하고 공감(박이문. 인식과 실존. 문학과 지성사, 1982. p.82)하는 작업이라고 박이문은 말한다. 현실임을 드러내는 풀과 나무와 짐승들이 가지는 물리적 존재의 세계는 의식의 차원을 떠나 있어 언제나 자족과 충만으로 보이고 갈등과 연민과 공포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의식 차원을 가진 인간은 그것이 될 수 없는 욕망으로서 결여에 대한 존재론적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언제나 자연과의 일체화를 꿈꾸는 것일까. 때로는 순간이지만 그것과의 합일을 꿈꾸며 시와 그림으로, 노래로 그곳에 가닿으려 한다.

존재와 의미 사이에서 그림 그리기와 그림 보기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물리적 존재와 그것을 일탈하려는 인간 의식 사이에서 하나의 시적 체험으로, 언어 없는 경험, 모순된 욕망을 그림 속에서 향유하게 한다. 세계와 내가, 자연과 내가 합쳐지는 행복의 순간에 다르지 않다. 사물과 내가 하나의 지속성으로 만나는 그 지속성이야말로 우영희의 이미지다.

부케를 들거나 화관을 쓴 신부는 이번 전시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엉뚱하다싶을 정도로 생경하고 어색하기만 한 짐승들이 등장하고, 새, 가시 박힌 식물들, 부유하는 꽃잎들, 신부의 화관에서 흘러내리는 꽃잎들, 바닥에 버려진 꺾인 꽃가지들, 꽃다발을 든 여인들, 내려앉을 듯 나는 새들, 빛나지 않는 태양이나 달, 머리 없는 여인, 두 손으로 안은 새나 고양이, 새의 머리에 고양이를 안은 인형, 빈 새장, 이런 것들이 순차 없이 눈에 든다. 이번 전시에서 조금 다른 변화는 동물인간, 인형인간의 등장이다. 얼굴이 고양이인 남자, 머리의 일부가 새가 된 여인, 인형과 사람이 합체된 여아의 모습이 그것이다. 병치의 구조에서 합체로 바뀌고 있다. 동물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미지에 개입하여 실재화 되려 한다. 동물되기 혹은 인형되기의 감각적 확장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 새나 인형조차 정면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측면의 얼굴에서조차 정면을 바라보게 한다. 그들의 시선은 화면 바깥의 관람자에게로 이어진다. 화면 곳곳에 드러나는 빈 곳, 환한 어떤 곳, 터널 같은 공간, 늪과 거울이 대비적으로 화면 안쪽으로 시선을 모으면서 모든 소재들이 그곳으로 빠져나가는 회귀와 귀환의 장치를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끝 간 데 없는 시선이며 대상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화면의 모든 것이 화면 자체의 내면으로 들어서는 시선이다. 이에 비해 정면시의 이 시선은 화면 밖으로 이어져 관람자의 시선과 부딪치면서 화면을 빠져나갈 수 없는 어색하고 생경한 만남을 준다.

이 모든 것들은 여전히 묘사도 채색도 구성도 어딘가 유보된 상태를 보여준다. 덜 그린 곰 인형, 색채로 뒤엉킨 덩어리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꽃잎들, 소용돌이치는 불확실하고 거친 붓질의 나뭇가지들은 하나의 흔적들이지 구체적인 대상의 묘사나 재현의 의지로 보기 힘들다. 치밀한 묘사나 채색이 모든 것에 통용되고 완성의 과정이거나 의미는 아니지만 때로 그리다 만 듯한 인상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미완의 인상은 작품전체의 의미를 이끌어가려는 장치 같다. 완성을 밀어내는, 한사코 완성을 거부하는 미완의 완강함이 의도적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치타, 버펄로, 사슴, 말 따위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직접적인 경험이 없지 않겠지만 대체로 현실의 필연성을 비껴하는 비현실 장면으로 전치의 순간을 불러내는 기제로 작동한다. 동물들과 병치되는 부케를 든 신부의 등장 역시 그런 맥락이며 초현실적 장면이랄 수밖에 없다. 비현실적 만남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무엇인지 지각하기 힘들지만 꿈속에서는 너무나 선명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의 만남이 아니라 원초적인 조우의 한 순간이다. 지각되지 않는 세계, 새와 꽃과 사슴과 인형과 여인을 감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음울하고 기괴한 파트너들로 이루어진 춤추는 장면은 사실의 지칭으로 그곳에 있기보다 그 지칭의 범위를 넘어서는 의식의 분출에 다르지 않다. 미완의 꽃들과 인간, 새와 짐승이 하나로 결합된 분리 이전의 심리적 상태이지만 언어 이전의 사물 체험에 가깝다. 일종의 원초적인 언어, 언어화되기 이전의 어떤 것이다. 현실적인 상황이기보다 어떤 우의적 장치에 가깝다. 그것이 만일 상징이고 현재의 만족이 아니라 기억이나 잠재된 어떤 것들이라면 결여의 다른 말들이다. 그 결여란 언제나 거울 속의 여자로, 늪 속에 떠있는 물풀이나 뿌리에서 절단된 꽃다발, 부유하는 꽃잎들로 감각화 되어 나타난다.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미완과 결여의 이미지는 서로 상관관계를 이룬다. 어떤 것도 가능하지만 현실로서 감당하기 힘든 공간과 시간이다. 화면 전체가 소재간의 긴밀함이나 구성의 밀도를 구축해나가기보다 하나의 텅 빈 공간처럼 그곳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어느 시간대에도 머물지 못하는, 어느 곳도 자신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니라 낯 선 곳에서 부유하는 표정이다. 서로 연결고리 없이 텅 빈 공간에 병치된 소재들의 어색함과 미완의 형상은 사실적 형상 저쪽의 당혹스러운 만남에 다르지 않다. 굳이 이런 정황들에 대한 표현을 작가 개인사의 일부로 들여다볼 이유는 없다. 신부의 부케는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에 연유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금만 돌이켜 보면 일상의 일이다. 일상은 개인의 것이기 전에 우리의 것이며, 보편적인 의례나 정서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도리어 이 보편적인 정서적 경험이 개인에 의해 보다 첨예하게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일상으로 은폐하고자 했던 것들을 스치듯 보게 될 뿐이다.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할까. 아니면 다 아는 일들을, 아니 정말 잊고 있었던 고통이나 당혹함에 새삼 당면한 것이기도 하다. 결여가 고통만이 아니라면 그런 경험을 안겨주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행복을, 어떤 사람은 시선을 피하려는 아픔이기도 하다. 그러나 행복이든 아픔이든 그 경험은 기억이며 환기며 시간 저쪽의 것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실제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 순간의 장면이 던지는 의미는 어느 곳 어느 때를 가리지 않고 불쑥 나타난다. 깊게 패인 어떤 결여란 그렇게 만나지는 것 아니겠는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소재들이 그렇다.

그중 유별난 것 중 하나가 신부다. 신부란 여자에게 하나의 축복이며 타자와 하나가 되는 행복의 순간이자 일자가 다자가 되는 욕망에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반복되는 것은 즐거움이자 고통의 경험이며 과잉의 충동으로 여겨진다. 고통과 즐거움이 반복되는 것은 원초적인 향락의 영역을 엿보는 것이다. 거울 앞에서 춤추고 있는데 막상 거울에 비친 것은 검은 눈물을 흘리는 피에로 자신의 얼굴, 선묘로 외곽만 잡은 곰 인형, 빈 새장 등은 규정된 현실의 이름들이 말하지 못하는 공백, 결여, 빈 곳, 구멍 사이로 드러나는 원초적 언어의 엿봄이다. 빈 공간과 연결 불가능의 소재 배치와 뿌리 없이 떠도는 꽃들, 단절된 소재들의 미완은 망각 속에 떠도는 사물과의 접촉으로 떠밀려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아는 언어가 아니라 내가 몰랐던 언어로 다가온다. 하나의 사물이자 몸의 체험이다. 언어가 몸이자 사물로 다가오는 순간인 것이다.

화면의 언어는 새, 꽃, 짐승, 부유하는 꽃잎, 긴밀함이 떨어지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형태의 연장이자 형태적 의미에 다르지 않다. 형상들은 자기만의 의미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느닷없는 동물의 등장,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짐승과 새들의 등장은 화면을 읽는 내내 난처하게 하지만 우리의 감각이나 사유가 인간으로만 침전된 한계를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동물을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중심의 한계를 해체하는 저항이다. 물론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동물들만이 인간의 주변에 있는 한, 인간과 동물이 화해할 가능성은 애초에 차단되고 만다는 것”(이종하, 아드르노-고통의 해석학, 살림, 2012. p.39)도 사실이다. 재현을 피하는 미숙함으로 외적으로 볼 수 없는 경험의 내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자체가 의식하지 못했던 세계를 나타내는 하나의 수사로 작동하는 것이다. 미완성의 빈 곳, 혹은 소재들 간의 공간을 싸고 있는 틈은 소재들의 비통일적이고 비합리적 배치에 기인하고 있지만 작업이 통상적 의미로 인식 불가능하다는 것에 다르지 않다. 감각할 뿐 인식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시선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자기고유의 기억’이 있고 의식적이거나 선의식적인 그 기억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으며, 그것이 오랜 시간의 훈련과 습관을 통해 특정 대상을 선호하고 물리치게 하는 반응체계를 형성해 준다” (백승영, 이성과 감성의 분리를 넘어-도취라는 미적 체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엮음, 『데카르트에서 들뢰즈까지』, 세창출판사, 2015. p.222-223)고 도취를 설명한다. 화면에 등장하는 신부와 꽃, 짐승들의 반복은 일종의 도취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투명한 의식과의 접촉 혹은 관계가 아니라 그 이전의 이미 존재하는 대상과의 육체적인 접촉 혹은 관계 속에서 이미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망각 속에서 기억해내는 대상들과의 육체적 만남이 던지는 카오스다. 그 만남은 삶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과 내가 하나의 지속성으로 만나는 곳이자 사물과 인간 간의 존재론적 동일성의 화면이다. 우영희의 작업은 몸으로 해석되는, 개념 이전, 의미화 되기 이전, 언어 이전의 지각이며, 전체의 경험으로서 이미 하나의 표현인 세계다.

- 평론글: 강선학, <몸으로 만나는 언어들 - 우영희전 K갤러리 부산 / 2017.8.1-8.12>

우영희 <처음부터 있었다>

우영희, < 처음부터 있었다>, Mixed media, 46×46cm, 2017

우영희 Woo, Young Hee

우영희 Woo, Young Hee

EDUCATION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서양화 전공 졸업

SOLO EXHIBITION
2017 FRACTAL - 혼돈과 질서의 반복적 패턴
2015 그윽한 시선 2014 미망(迷妄)하다-over and over
2013 동물에 투사된 알터 에고
2012 은현이 준 선물
2010 달콤씁쓸한 또 다른 삶의 조각

GROUP EXHIBITION
2016 백인백색전
2016 제2회 국제환경미술제
2012 나는 너의 의식이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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